불기 2552 (2008)년
10월 3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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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식 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

“이 사람아! 나는 종을 위해 한쪽 눈을 바쳤어. 혼을 담아야 천년의 소리가 나오는 거지. 잔재주 부리면 끝이야”라는 한 증권회사 CF를 통해 더 익숙한 무형문화재 112호 주철장 원광식(67)씨를 만나기 위해 지난 9월24일 진천 작업실을 찾았다. 마침 이날은 최근 화천시의 의뢰를 받아 주조한 1만관(35.7톤)짜리 대종의 소리 테스트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국내는 물론 지금껏 그가 조성한 종 가운데에는 최대 크기이지만, 그간의 연구와 노력이 집적된 성과물이란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청아한 부처님 음성, 세상에 전하고파”

  

  일평생 쇳물과 씨름…전통기법 복원에 온힘

  범종 토대 ‘최고 소리’찾으려 연구회도 설립

 

처음 종을 만진 것은 지금부터 46년 전의 일이다.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겠다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차 정비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8촌 형의 권유로 종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뻘의 8촌 형은 종 제작사인 성종사(聖鐘社)의 대표이기도 했다. 형은 항상 그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줄 것을 부탁했다.

결국 그는 1962년 군 제대와 함께 본격적으로 종 제작에 뛰어들었다. 기술을 익히는 틈틈이 공장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처리했다. 때 마침 사찰과 교회 수가 급증하면서 그의 손은 더 바빠졌다. 숨 돌릴 틈 없이 일하던 어느 날, 불의의 사건이 발생했다. 아침 일찍 100관(375kg)짜리 종을 제작하기 위해 쇳물을 녹이던 중 쇳물이 1200도가 넘는 쇳물이 폭발한 것. 그 바람에 그의 눈에 쇳물이 튀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다. 결국 그는 오른쪽 눈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친 눈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머지 왼쪽 눈까지 실명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한 쪽 눈 없이 살 바에야 차라리 맹인이 되고 말지”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끝내 수술을 거부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결국 그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방황 끝에 작은 주물공장을 운영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72년 예산 수덕사 범종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당시 수덕사 주지였던 원담스님(1926~2008)을 찾아가 그는 “노임은 필요 없고 재료만 구입해주면 제대로 된 종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승낙을 얻어냈다. 종이 완성될 때까지 1년 여간 종을 만들었다. 머리를 깎고 수덕사에 들어간 그는 행자 아닌 행자 생활을 하며, 조석예불도 빠지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범종이 완성되고, 그의 첫 불사는 성공적으로 회향했다.

1973년 8촌 형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성종사의 2대 대표를 맡게 됐다. 이듬해에는 부산 범어사에서 1년간 머리를 깎고 행자생활을 하면서 종을 만들었다. 당시 고암스님은 그에게 범산(梵山)이란 호를 내렸다. 종을 하나 완성할 때마다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원담스님의 도움도 컸다. “어느 절에서 종 불사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절에 직접 찾아가서 저에게 종을 맡기라고 추천을 해주실 정도였다”고 한다. 종을 잘 만든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범종제작을 의뢰하는 사찰이 줄을 이었다.

현재 조계사, 용주사 등 전국 교구본사 중 18 곳의 범종이 그의 손을 거쳤다. 너도나도 종 제작을 신청한 덕분에 먹고살 걱정도 사라졌다. 하지만 아쉬움이 그를 따라다녔다. 알아주는 범종제작사의 대표가 무엇이 아쉬웠을까. 그는 자신의 종소리가 성에 차지 않았다고 했다. “내 마음에 와 닿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은 불교의 종뿐”이란 생각에 현존하는 범종을 토대로 최고의 소리 찾기에 나섰다. 1976년 한국범종연구회를 발족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소리의 비밀을 풀기 위해 크고 작은 모양의 종들을 수없이 만들어야 했다. 그가 만든 종으로, 학자들은 완벽한 소리에 필요한 종의 구성성분과 두께, 문양의 위치, 모양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데이터를 구축해갔다. 옛 소리를 재현하기 위한 실험도 계속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을 갖고 있으며, 소리가 좋아 최고로 꼽히는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이야 말로 그가 재현해야할 최고의 모델이었다.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리는 이 종을 다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연구를 거듭했다.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게 예술”이란 생각에 실패도 두렵지 않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사라진 선조들의 밀랍주조기법을 복원하는게 핵심이었지만 막막할 다름이었다. 현존하는 자료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까지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숭실대 박물관에서 우연히 실마리를 찾아냈다. 10여 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고령토, 기왓장 가루, 창호지 등 안 해본 방법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정말 간단했다”는 것이다. 1997년 드디어 전통 범종 제작기법을 구현해낸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형 종 조성에서 요구되는 밀랍주조기법까지 완성하게 된다. 그는 “1000년이 가도 깨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종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의 자부심은 자신의 특허인 ‘밀랍주조공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그에게 있어 신라 종은 특별하다. 그래서 남은 시간동안 신라의 소리를 되살리려고 한다.

“에밀레.상원사종 등 신라시대 종 복원 희망”

옛 종 복제 시급해…소리박물관 건립 소망도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모형뜨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의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범종 복제에 대한 인식이 낮았는데 보물이었던 낙산사 동종이 불에 녹아버린 이후 복제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어 그나마 다행”이라며 “그 덕에 내소사나 청룡사 종을 최근 복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에밀레종과 함께 이제 마음껏 칠 수 없는 국보 36호 상원사종이 하루빨리 복제되길 희망하고 있다. “신라종을 복원하고 나면 고려와 조선의 종을 차례대로 복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소리의 우수성을 세계인들에게 알리겠다고 덧붙였다. 소리문화재를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로 남기겠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기도 하다. 범종연구회와 함께 국제세미나를 여는 까닭도 여기 있다. 소리를 연구하는 각국의 학자들을 불러 모아 우리 소리를 직접 들려주고 깨달을 수 있게 하려는 뜻이다.

또 전국 사찰에 남아있는 옛 종들을 복원하는 일도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옛 종이 300여개가 있지만 모두 깨져서 소리를 내지 못한다”며 “방치돼 있는 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형태와 모양을 되살려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로 유출된 선조들의 종을 재현하는 일의 중요성도 잊지 않았다. “종의 기원을 찾아 몇 차례 일본을 방문하면서 60개의 우리 종이 일본으로 가있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이 가운데 신라종 2기와 고려종 2기, 조선시대 종 1기에 대해 어렵사리 모형을 확보했다”고 한다.

“일본 내 한국 종 중 일부는 망실된 것이 많은데 지금이라도 한국정부차원에서 보존이 필요한 것은 복제해 둬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종을 만들어온 지 올해로 벌써 46년째. 그동안 만든 종만 7000여개. 국내에 있는 대형 종의 70% 이상이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복원된 낙산사 동종도 그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고, 해마다 새해를 맞는 자정이면 타종되는 보신각의 종도 그가 만들었다.

지금도 전국의 사찰을 비롯해 시군구 등에서 그에게 종을 의뢰하고 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소망은 소리박물관 건립이다. 종 박물관을 소리박물관으로 확대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종은 물론 소리를 내는 모든 악기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사람들이 직접 쳐볼 수 있는 체험의 장으로 활용한다면 좋을 것”이라며 “세계적인 종 박물관을 만드는 것까지 마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원광식 주철장은…

194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그는 8촌 형인 원국진으로부터 사사를 받아 범종 제작에 입문했다. 스승이기도 한 원국진의 죽음으로 성종사를 짊어지게 된 1973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종 제작에만 매달려왔다. 전문적인 종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1976년 한국범종연구회를 발족했으며, 전통 제작기법을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결국 10여년 간 각고의 노력 끝에 1997년 전통 범종 제작기법인 밀랍주조공법을 독자적으로 재현하는데 성공한 그는 2000년 노동부가 지정하는 대한민국 명장(名匠)으로 꼽혔으며, 노동부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듬해는 중요무형문화제 112호 주철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2002년부터 그는 서울을 떠나 진천의 작업장에서 머물며 범종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오랜 연구 끝에 2005년에는 중기청 지원사업인 기술혁신 개발사업을 통해 대형범종 제작에 적합한 새로운 밀랍주조공법을 개발해 특허까지 얻었다. 이 기세를 몰아 2005년 진천에 국내 최초의 종 박물관을 개관했으며 문화예술분야 신지식으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종 만드는 것밖에 몰랐던 장인의 명성은 국내는 물론 세계로까지 알려졌다. 그가 만든 종은 일본, 싱가폴, 대만, 중국, 말레이시아 등 불교권 국가들은 물론 미국에까지 수출돼 범종 제작에 대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불교신문 2463호/ 10월1일자]

2008-09-26 오후 9:35:06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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